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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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별세
  • 박현수 기자
  • 승인 2021.02.15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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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렴으로 지난해 1월 서울대병원 입원
1967년 백범사상연구소 설립 민주화 운동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1년여의 고통스런 투병생활을 끝내고 15일 향년 89세를 마지막으로 별세했다. 서울대병원에 따르면 백 소장은 이날 오전 입원 중 별세했다. 그는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생활을 이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화 운동의 큰별 백기완 선생이 15일 별세했다.
민주화 운동의 큰별 백기완 선생이 15일 별세했다.

백 소장은 1932년 황해도 은율군 동부리에서 아버지 백홍렬과 어머니 홍억재 사이에서 4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인 백태주는 장련면의 유지로 있으면서 1922년 장연농민공제회 창립 당시 회장으로 재임했다.

백태주는 3·1운동 당시에도 수천장의 태극기를 제작하고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등 민족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백 소장은 백범 김구 선생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 김구 선생은 1898년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감리서에 수감됐다가 탈옥했는데, 당시 황해도 은율 땅을 몰래 지날 때 조부 백태주가 김구 선생을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켰다고 한다.

해방 이후 부친 백홍렬이 백 소장을 서울로 데리고 가 김구 선생을 만나게 했고, 그때부터 백 소장은 김구 선생을 따르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백 소장은 재야 운동가로 1950년대부터 농민과 빈민운동 등 한국 사회운동 전반에 적극 참여했다. 1960년대에는 한일협정 반대 투쟁을 계기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백 소장은 1967년 통일문제연구소의 모태인 '백범사상연구소'를 세웠으며, 3선 개헌 반대와 유신 철폐 등 활동에도 참여했다.

1974년에는 유신헌법 철폐 100만인 서명 운동을 주도하면서 긴급조치 1호를 위반한 혐의로 12년형을 선고받은 뒤 옥살이를 했고, 1975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다.

백 소장은 1979년에는 'YMCA 위장결혼 사건', 1986년에는 '부천 권인숙양 성고문 폭로 대화'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돼 혹독한 고문과 옥고를 치렀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했지만 김영삼·김대중의 후보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고, 이후 5년 뒤인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독자 민중후보로 다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대선에서 낙선한 백 소장은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뒤, 자신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에서 통일운동과 노동운동 등을 지원했다.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백 소장은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랫가사의 원작으로 알려진 시 '묏비나리'를 짓기도 했다.

백 소장은 창작활동에도 힘을 썼는데, '장산곶매 이야기'와 '부심이의 엄마생각' 등 소설과 수필집을 펴냈다. 그는 열렬한 국어순화론자로,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되도록 순우리말을 썼다고 한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숙씨와 딸 원담(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미담·현담, 아들 일씨가 있다. 백 소장의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차려졌다. 발인은 19일 오전 7시이며, 장지는 모란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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